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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정원일기(고종∼순종) [전15권]
격동기의 한국 최근세사를 생생하게 기록한 종합사료!
조선시대에 왕명을 출납하던 승정원에서 날마다 취급한 문서와 사건 등, 국가기밀을 기록한 것. 고종에서 순종까지 매일 매일의 일기로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외교, 군사 등 모든 분야를 총망라! 원본의 亂草를 해서(楷書)로 정서(精書)로 원고에 구두점을 찍어 반번역의 효과 를 가져옴으로써 쉽게 해독할 수 있게 배려하여 사학자는 물론 대학원생도 용이하게 독파할 수 있는 완질(完帙) 축쇄(縮刷) 영인판(影印版)!
 • 저 자 : 국사편찬위원회
 • 출판사 : 도서출판 탐구당
 • 출판일 : 1970년
 • 페이지 : 평균 1000면
 • 판 형 : 국배판
 • 판 수 : 초판
 • 도서번호 : 0000
 • 가 격 :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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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간 행 사 - 전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 박영석
국사편찬위원회에서는 1960년에 승정원일기 간행사업에 착수하여 이듬해 그 첫권을 간행하 고 18년 간의 시일에 걸쳐 사업을 진행시켜 1977년에 총141권으로 완간하였다. 국사편찬위원회의 기능 중에서 사료의 간행 보급은 중요한 임무로서, 조선왕조실록·비변 사등록·승정원일기 그리고 各司謄錄 등 기본사료의 간행으로 조선시대연구에 크게 이바지 하고 있다.
승정원일기는 조선왕조에 있어서 왕명을 출납하는 승정원에서 날마다 취급하던 문서와 사 건내용을 자세히 기록한 것으로, 초기의 일기는 임진왜란과 이괄의 난으로 말미암아 소실되 었고, 현재 인조 원년(1623)부터 융희 4년(1910)가지의 승정원일기 원본 3,245권이 서울대학 교 도서관 규장각 도서실에 보관되어 있다. 그러나 이 일기는 귀중한 유일본이므로 누구나 자유로이할 수 없을 뿐 아니라 그 내용이 漢字亂草로 되어 있기 때문에 이를 해독하기가 지 극히 어렵다.
이러한 희귀성과 난해성을 해소하고 한국학연구자들이 보다 쉽게 이용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전국적으로 우수한 한학자를 초빙하여 승정원일기의 난초(亂草)를 해서등사(楷書謄 寫)하고 엄밀한 교열을 거쳐 펴내니, 작성된 원고가 38만여매(枚)에 간행된 책이 141권에 이 르는 커다란 사업이었다.
승정원일기는 세계에서도 보기드문 방대한 역사기록으로, 실록의 편찬자료가 되었으므로 사료적 가치가 높으며, 조선시대 연구에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전체 한국사 연구에 기초자료가 되는 것이다.
• 승정원일기의 해제(解題)
1. 승정원일기는 조선시대에 왕명을 출납하던 승정원에서 날마다 취급한 문서와 사건을 기록한 것으로, 인조 원년(1623)부터 융희 4년(1910)까지 조선왕조 후반기 288년간의 일기 원본 3245권이 현존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다. 승정원은 국가의 모든 기밀을 취급하던 국왕의 비서실이라 할 수 있는 것으로 정원(政院) 또는 은대(銀臺)라고도 하며, 도승지·좌승지·우승지·좌부승지·우부승지·동부승지 등 승지 6명과 주서(注書) 2명, 사변가주서(事變假注書) 1명으로 조직되었으며, 사무에 종사하는 아전(衙前)으로 서리(書吏) 25명과  隸(使令) 20명, 잡역에 종사하는 종으로 차비노(差備奴) 12명과 근수노( 隨奴) 15명이 부속되어 있었다. 영조시대에 편찬한 동국문헌비고와 고종시대에 편찬한 은대조례(銀臺條例)·은대변고(銀 臺便攷)·정원고사(政院故事) 등 저서에 의하면 승정원의 명칭이 세조시대에 처음 나타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실록에 의하면 승정원의 칭호는 정종 2년(1400)에 발생하였고 그 제도가 완성된 것은 세종 15년(1433)의 일이다. 그러나 이 제도의 기원은 고려초기 성종시대 까지 올라갈 수 있는 것이다.
2. 조선개국후 태조 원년(1392) 7월 28일에 처음으로 관제를 제정할 때, 고려구제에 의하여 도평의사사(최고회의기관)와 문하부(최고행정기관)·중추원·사평부·육조 기타 각사를 설치하였는데, 중추원에 판사 1명(정2품)·使 1명·지사 2명·동지사 4명·僉使 1명·副使 6명·학사 1명·상의원사(商議院事) 3명 (이상 종2품)·도승지·좌승지·우승지·좌부승지· 우부승지 각 1명 (이상 정3품)·당후관 2명 (정7품)을 두어, 상의원사 이상으로 하여금 병기(兵機)·군정·숙위(宿衛)·경비에 관한 사무를 맡아보게 하고, 승지로 하여금 왕명을 출납 하게 하고, 당후관으로 하여금 기록을 담당하게 하였는데, 정종 2년(1400) 4월에 관제를 개정하여 도평의사사를 의정부, 중추원을 의흥삼군부로 개칭할 때, 중추원승지를 승정원 승지, 중추원당후관을 승정원당후관으로 개칭하여 처음으로 승정원을 설치하고 군사사무와 왕명의 출납사무를 분리하였다. 그러나 다음해 즉 태종 원년(1401) 7월에 다시 관제를 개정하여 문하부를 의정부에 합하고 의정부를 최고행정기관으로 정할 때, 의흥삼군부와 승정원을 합하 였는데, 이때 승정원승지를 승추부지신사(承樞府知申事), 승정원좌우승지와 좌우부승지를 각각 承樞府左右代言·左右副代言이라 하고, 知申事는 吏曹, 左代言은 兵曹, 右代言은 戶曹, 左 副代言은 禮曹, 右副代言은 工曹의 사무를 각각 분담하여 출납하게 하였다. 마치 오늘날 각국 대통령 비서실에 총무비서·경제비서·공보비서 등 각종 비서가 있는 것과 같은 것이었 다. 육조 중 형조의 의 공사에 한해서는 이때까지 專任代言을 두지 아니하고, 刑曹都官에 知印을 설치하고 노비의 소송을 담당하게 하는 한편 왕명의 출납을 겸행하게 하였으나, 태종 5년(1405) 正月에 육조의 권한을 확장할 때 刑曹公事를 출납하는 전임대언으로 同副代言을 신설하여 육대언이 성립하게 되었다.
3. 육조는 조선개국 당초부터 고려관제에 의하여 설치한 것이나, 육조의 長인 전서(典書)는 정삼품으로 그 직품이 낮을 뿐만 아니라, 의정부가 각 사(司)를 총괄하고, 사평부(司平府)가 전곡(錢穀), 승추부(承樞府)가 군기(軍機), 상서사(尙瑞司)가 인사권을 장악하였기 때문에 육조는 조정에 간여하지 못하였다. 태종 5년 정월 15일에 육조(六曹)전서(典書)를 판서(判書) 로 개칭하여 정2품으로 승격시키는 동시에 사평부를 호조, 승추부를 병조에 합하고, 상서사의 문관인사권을 이조, 무관인사권을 병조에 이관시키고, 의정부 소속 각 사(司)를 육조에 나누어 주어 육조의 실권을 대폭 확장하였는데, 이때 승추부 대신 승정원을 설치하여 지신사(知申事)와 오대언(五代言) 및 당후관(堂後官)을 이에 부속시키고, 동부대언(同副代言)을 신설하여 형조공사(刑曹公事)를 출납하게 하였던 것이다. 실록에는 태종 5년 정월 15일조(條)에 승정원을 설치하였다는 기사가 보이지 아니하나, 동년 12월 무진조(條)에 황희를 승 정원지신사에 임명하였다는 기사가 있고, 그 후 계속하여 승정원의 명칭이 보이므로, 승정원은 태종 5년 정월 15일에 승추부를 폐지할 때 설치한 것이 명백하다. 그리고 세종 15년 (1433) 9월에 지신사를 도승지(都承旨), 대언을 승지(承旨)로 개정하여 도승지·좌승지·우승지·좌부승지·우부승지·동부승지 등 육승지제도가 완성되었는데, 이 제도는 고종 31년 (1894) 갑오개혁 때까지460여년간 존속하였다.
4. 승정원에 육승지를 설치한 것은 당시의 행정조직이 육조로 구분되었기 때문이어니와, 승 지는 육조의 공사만 출납하는 것이 아니라, 국사를 총리(總理)하는 의정부, 백관의 비행을 규찰하는 사헌부, 임금의 잘못을 간하는 사간원, 문한을 담당한 홍문관과 기타 국가의 모든 공사를 출납하였다. 임금이 의정부 또는 육조·대간(사헌부·사간원)·홍문관 등 각 기관에 어떤 명령을 내릴 때에는 직접 그 기관에 하명하지 아니하고 반드시 승정원에 하명하여 그 기관에 통하였으며, 반대로 의정부 등 각 기관에서 국왕에게 상소 또는 건의를 할 일이 있 으면 또한 직접 국왕에게 상주(上奏)하지 못하고 반드시 승지를 통하여 상주하였다. 물론 의 정부 영의정을 비롯한 국가의 중신(重臣)과 대간(臺諫)·홍문관(弘文館) 관원들은 직접 국왕 과 대면하여 국사를 논의할 수 있으나, 단독으로 국왕과 면담하지 못하고 반드시 승지와 史 官(注書와 藝文館 관원) 입회 하에 면담하였다. 만일 승지와 사관 없이 단독으로 면대하면 대간의 탄핵을 맞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정치적 모략과 중상을 방지하기 위하여 설정한 예 규로서 조선왕조 500년을 통하여 엄격히 시행된 것이다. 그리고 조선시대의 정치는 대개 국 왕의 학문을 교수(敎授)하는 경연(經筵)석상에서 많이 논의되었는데, 직제상 승지는 경연참 찬관(經筵參贊官)을 겸하고 주서는 춘추관기사관(春秋館記事官)을 겸하였기 때문에 모두 경 연에 입시(入侍)하여 논의된 사실을 기록하였으며, 또 국가의 중대사를 논의하기 위하여 특 별히 소집하는 백관회의(百官會議)에도 승지와 주서가 참석하여 회의의 내용을 기록하였다. 그러므로 승지와 주서는 당시의 정치·경제·사회·외교·군사 등 국가의 모든 기밀을 모르 는 것이 하나도 없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이 기록한 승정원일기는 조선왕조의 최대기밀기록 인 동시에 국사연구상 제일차적 기본사료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본서는 실록을 편찬할 때 항상 자료로 사용하였기 때문에 실록보다 훨씬 가치있는 것이다.
5. 승정원일기는 한달에 한권씩 기록하는 것이 원칙이나, 사건이 많을 때에는 2권 이상으로 편성하였다. 그러므로 만일 조선왕조 519년 간 승정원일기가 다 남아있다고 한다면, 3년에 한번씩 있는 윤월(閏月)을 가하여 6400여권이 될 것이다. 그러나 광해군 이전의 승정원일기 는 수차의 병화로 인하여 오유(烏有)에 돌아가고, 다만 인조 원년(1623) 이후의 일기 3000여 권이 남아 있는데 그것도 수차의 화재로 인하여 보수한 것이 900여권이나 된다. 조선초기 이래 약 200년 간 승정원일기는 본래 경복궁 근정전 서남쪽 월화문 밖에 위치한 승정원에 보관하였으나,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다른 국보·전적(典籍)과 함께 소실 되고, 임진왜란 이후 인조 원년까지 32년 간 승정원일기는 인조 2년(1624) 이괄의 난에 의하 여 또한 소실되었다. 임진왜란 이전의 승정원일기는 다시 복원하지 못하였으나, 이후의 승정 원일기는 이괄의 난이 일어났을 때 승정원 서리 홍덕인이 승정원일기 26권과 광해군 시대의 조보(朝報) 전수(全數)를 구출하여 안전한 곳에 옮겨 두었기 때문에 평란(平亂) 후 이것을 주로 하여 광해군일기를 편찬함과 동시에, 각사등록(各司謄錄)과 일찍이 주서를 지낸 사람들 의 가장(家藏) 사초(史草)를 수집하여 임진이후의 승정원일기를 완전히 보수하였다. 주서는 재임 당시 공적으로 승정원일기를 작성할 뿐만 아니라, 사적으로 사초를 작성하여 두었다가 실록편찬자료로 제공하도록 규정되어 있기 때문에 이를 수집하였거니와, 주서의 사초는 흔 히 당후일기(堂後日記)라 하고 문집 가운데 넣어서 출판하는 예가 많이 있다.
6. 인조시대에 임진왜란이후의 승정원일기를 보수한 뒤, 승정원일기는 창덕궁 인정전 동쪽 연영문 내의 승정원에 보관하였는데, 영조 20년(1744) 10월 13일의 승정원 화재로 인하여 재 차 승정원일기 대부분이 소실되었다. 그러므로 동 22년(1746) 5월에 일기청을 설치하고 이를 개수하였는데, 영조실록과 이 때의 개수시말(改修始末)을 기록한 일기청등록(日記廳謄錄)에 의하면, 당시 소실된 승정원일기는 선조 25년(1592) 임진부터 경종 원년(1721) 신축까지 130 년 간 일기 1796권이오, 경종 2년(1722) 이후 23년 간 일기는 화재를 면하였다. 그리고 소실 된 부분 중에도 경인년일기 1책과 기해년일기 2책은 때마침 진연(進宴)의 전례를 조사하기 위하여 대내(大內)에 들어가 있었기 때문에 소실을 면하고, 또 타다가 남은 신여일기(燼餘日 記)도 상당한 수에 달하였다. 그런데 승정원일기는 실록보다 훨씬 상세하고 국가에서 항상 참고하는 것이므로 영조 22년(1746) 5월에 일기청을 설치하고 홍계희·임연·이철보를 당상 (堂上), 송창명 등 15명을 낭청(郎廳)에 임명하여 이를 개수하게 하였거니와, 선조·광해군 양대의 사료는 거의 인멸하였으므로 인조 원년(1623) 계해부터 경종 원년(1721) 신축까지 99년 간 일기만 개수하기로 결정하고, 시강원(侍講院) 소장 역대의 춘방일기(春坊日記)와 조 보십여태(朝報十餘 )를 비롯하여 정부·육조·대간·홍문관 기타의 사대부가 소장 조보와 기록 등을 널리 수집하여 개수하였다. 처음에 일기청당상 홍계희·임연·이철보 등이 15명 의 낭청을 데리고 개수하기 시작하였으나, 그 해 11월에 이르기까지 6개월 동안에 9년 간 일기 밖에 개수하지 못하였다. 이와 같은 진도로 나간다면 나머지 90년 간 일기를 개수하는 데 5·6년의 시일을 요하겠으므로, 11월 17일에 낭청을 45명으로 증원하고 이것을 세방으로 나누어 한방에 15명, 매인당(每人當) 2년씩 평균분배하여 엄격한 절목(節目)을 세우고 3명의 당상관이 각각 한방씩 사료의 초출(抄出)과 서역(書役) 및 교정을 지휘 감독하여 만 1년 후 인 영조 23년(1747) 11월 18일에 548권의 승정원일기를 개수 완료하였다. 소실된 일기 1796 권에 비하여 3분의 1도 되지 아니하나, 기사마다 출처를 명시하고 권말에 쓴 사람과 교정한 사람의 성명을 기입하여 책임의 소재를 명시하였다. 현존 승정원일기 중 인조 원년 계해부 터 경종 원년 신축까지 최초의 548권은 곧 이때에 개수한 것이며, 기사마다 말미에 출처를 표시한 분주(分注)가 있고 또 권말에 서역낭청(書役郎廳)과 교정낭청(校定郎廳)의 성명이 기 입되어 있는 것은 이 까닭이다.
7. 이상과 같이 영조시대에 인조 원년 계해이후 99년 간 승정원일기 548권을 개수한 뒤, 경 종 2년 임진이후의 주서가 기록한 원승정원일기와 함께 창덕궁에 새로 건축한 승정원에 보 관하였는데, 고종 25년(1888) 무자 3월 7일 밤에 또다시 승정원에 불이 일어나 좌우당협방에 보관하던 일기 361권이 소실되었다. 소실된 일기는 모두 가장 가까운 시대의 것이며, 그 시대의 조보와 각사의 등록이 완전히 남아있었으므로, 고종 26년(1889) 8월에 영의정 심무택의 건의에 의하여 영조시대와 같이 일 기청을 설치하고 박용대·김종한·김병수·김춘희·민영달을 당상, 김필수 등 15명을 낭청 에 임명하여 이를 개수하게 하였는데, 개수를 완료한 것은 동 27년(1890) 12월이며, 주요 자 료는 조보와 일성록이었으나 기타 각사의 등록과 일찍이 주서를 지낸 사람들의 당후일기도 널리 채집하였다. 승정원일기는 영조·고종 양차의 화재 이후외에도 관리의 부주의로 3·4권 혹은 10여권씩 분실한 것이 수차있었다. 그러나 권수가 얼마되지 않기 때문에 그때마다 승지·주서로 하여 금 곧 보수하였다. 그러므로 승정원일기는 인조 원년(1623)부터 융희 4년(1910)까지 288년간 의 일기원본 3245권이 한권이 결본도 없이 전하여 온다.